근래 영국 왕세손들의 이야기가 부쩍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현 왕세손비 케이트 미들톤(Kate Middleton)은 뛰어난 미모와 패션 감각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 그와 더불어 젊은 나이에 고인이 된 비운의 시모(媤母) 다이애나 비(Princess Diana, 1961~1997)에 대한 사랑도 결코 식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20여 년 전 필자는 다이애나 비와 관련해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다이애나 비는 서거하기 전 이집트 출신 영국 장교와의 염문설 때문에 곤욕을 치렀습니다. 하지만 국내 언론까지 왕세자비의 염문설로 요동치던 당시 다이애나 비는 각종 공식석상에 자선사업가로서 관심의 중심에 있었고, 심지어 존경의 대상이기까지 했습니다.
그 무렵 영국의 한 저명한 교수가 방한해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필자는 그 교수에게 다이애나 비에 대한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습니다. 영국 국민이 다이애나 비의 불륜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리고 다이애나 비가 어떻게 국민의 사랑을 되찾게 되었는지 심히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영국 교수는 자신도 마음이 가볍지는 않다면서, 아마도 다이애나 비의 솔직한 고백이 국민의 마음을 돌려놓았을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필자는 그의 말을 수긍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영국 왕실과 국민의 실망이 쉬이 가실 리는 없을 테니 말입니다. 필자의 표정에서 그런 생각을 읽었는지 교수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그 무렵 다이애나 비는 ‘국제적 지뢰 제거 운동(Ban Landmines)’ 등 다양한 공익활동을 열정적으로 펼치고 있었습니다. 다이애나 비가 사회사업과 관련해 BBC TV에 출연했을 때의 일입니다. “염문설이 있는데 ……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진행자의 느닷없는 질문에 다이애나 비는 당혹해하는 모습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때 다이애나 비는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토로했다고 합니다. “언급하기 어렵지만 염문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무거운 심정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싸늘하기만 하던 여론이 이 인터뷰를 계기로 확 바뀌었습니다. 다이애나 비의 윤리적 흠집보다는 감추고 싶은 민감한 약점을 솔직하게 공개석상에서 고백할 수 있는 강한 정직성을 높이 평가한 것입니다.
당시 필자는 영국 사회가 한 공인을 평가함에 있어 윤리적 결함보다는 정직할 수 있는 용기를 더 높이 평가한다는 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를테면 정직의 사회성을 본 것입니다.
영국 교수의 설명을 들으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한 것은 아마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한 지도층의 말 바꾸기 행태에 대한 반사작용 때문일 것입니다.
조금은 다른 맥락의 얘기지만, 필자는 정치인의 거짓말을 ‘참 멋지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서독 총리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 1918~2015)가 재무장관으로 재직하던 1974년경의 일입니다.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슈미트 재무장관은 독일 마르크화의 환율 조정이 불가피하다는 소문이 시중에 돌고 있는데 그게 사실이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에 슈미트는 주무장관으로서 강력하게 반박했습니다. “환율 조정은 앞으로 절대로 없습니다. 지금의 환율 관련 소문은 환율 조작꾼들의 저질적인 음모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당시 필자는 슈미트의 결연한 자세에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헬무트 슈미트, 마르크화 환율 조정”, “마르크화 강세, 독일 경제의 먹구름”이란 헤드라인이 조간신문을 장식했습니다. 그리고 각종 언론 매체에서는 헬무트 슈미트가 공영방송에 출연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비판적으로 언급했습니다.
당일 오전 슈미트 장관은 기자회견을 했고, 이 자리에서 기자들은 어제저녁 TV에 출연해서 환율 조정은 절대 없다고 해놓고 몇 시간도 되지 않아 생각을 바꾼 이유가 무엇인지 추궁했습니다.
그때 슈미트 장관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어젯밤 환율을 조정하겠다고 발표했다면, 국내 독일인은 심야에 손을 못 쓴 반면 시차 덕분에 미국의 환율 전문가들은 활발히 움직여 반사 이득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자 독일 언론에서는 슈미트의 말을 “어쩔 수 없는 거짓말(Notluege)”이었다며 옹호하는 논평이 뒤따랐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슈미트는 서독의 총리가 됩니다.
그러나 작금 우리 사회의 양상은 많이 다릅니다. 한 나라의 총리를 지낸 사람이 수뢰 관련 혐의를 받고는 돈을 건넸다는 사람은 일면부지의 인물이라고 펄쩍 뛰면서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다 며칠 후에는 어렴풋이 만나본 기억이 난다고 하고, 또 얼마 후에는 만났지만 돈은 받지 않았다고 하고, 끝에 가서는 돈은 받았지만 청탁성은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무슨 사건이 터졌다 하면 이런 식의 볼썽사나운 ‘서푼짜리 드라마’를 역겹게 지켜봐야 합니다.
특히 우리 사회에 난무하는 공인들의 생각 없는 거짓말에는 신물이 날 정도입니다. 이런 추태를 지켜보노라면 우리 사회의 도덕이 날개 없이 추락하는 듯한 심정입니다. 그리고 영국 사회가 다이애나 비의 윤리적 결함보다 정직의 덕목을 더 높이 받아들였다는 얘기가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아울러 이는 우리가 일류 사회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반드시 챙겨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필자소개 : 이성낙
뮌헨의과대 졸업. 프랑크푸르트대 피부과학 교수, 연세대 의대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역임.
현재 가천대 명예총장, 의ㆍ약사평론가회 회장,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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